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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라면(한국어라면),마이니치 신문

화요논설: 일본어라면(타마키 켄지), 마이니치 신문

 

종합잡지의 목차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잡지 ‘세계’의 1955년 12월호에는 원자력 에너지, 북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보수합동 등 주목도 높은 테마와 함께 학교 영어 교육에 의문을 던지는 평론가 카토 슈이치씨의 사설이 실려 있다. 바로 ‘신슈(信州, 지명) 여행지에서-영어 의무교육화에 대한 의문’이다. 카토씨는 나가노 교사들과의 토론을 계기로 영어교육이 원래 중학교에서는 선택과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필수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 배경에는 전후(戰後)에 나타난 국제화의 흐름, 고교 입시 과목에 영어가 포함된 과정 등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카토씨는 장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전국의 모든 중학생에게 일괄적으로 영어교육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외국어 학습의 조기 교육에는 찬성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것을 전제로 한다. 어설픈 영어보다 먼저 일본어부터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사설은 큰 반향을 일으켜 학습기회의 평등, 영어를 통한 국제적 시야의 양성 등을 주장하는 논객들의 반발이 일었다. 카토씨는 그 다음해인 1956년 2월호에 ‘다시 한번 영어교육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을 적었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일본인 중 어떤 일부에게 외국어는 필요악이다. ‘악(惡)’이라는 감정과 경험 없이 ‘필요’만을 내세우는 이야기는 핑계에 불과하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체험담이 담겨있다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외국어를 사용하면서 이게 일본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런 절실한 감정과 경험의 뒷받침 없이 외국어를 구사한다면, 설령 구실에 맞더라 하더라도 그 말의 가치는 사라진다’

 

카토씨는 영어, 불어, 독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지만 뜻을 전달할 때 정작 일본어는 소용이 없다. 그런 답답함이야말로 현지 외국어 습득의 절실한 이유일 것이다.

 

시대는 변화하고, 진학률은 현격히 높아져 '영어'는 대다수의 중학생, 고등학생에게는 여전히 ‘입시를 위한 영어’이다. 한편, 인터넷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국경을 간단히 넘어 해외와의 접촉도 빈번해져 기업내의 영어 공용화 바람도 줄을 잇고 있다.

이에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정식으로 교과로 지정하여 조기화가 정책으로 제창되었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일률적으로 영어수업을 부과하는 것보다 일본어로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을 제대로 하자는 주장은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영어교육논쟁은 다이쇼(大正, 일본의 연호로 1910~1920년대를 지칭)때부터 반복되어 왔다고 한다. ‘초등학교 영어’의 실속을 위해서라도 각각의 지적과 주장, 이론을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원문: http://mainichi.jp/opinion/news/20130611ddm003070047000c.html

 

아래 포스팅을 번역할 때 같이 번역한  글이다. 다른 글 같지만 결국 뜻이 이어지는 글이기에 같이 포스팅하고 싶었다. 우리나라 국어교육 예산이 영어교육 예산의 1/163도 되지 않는다던가. 외국어 교육도 좋지만 그렇다고 국어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아닌가. 너무나 당연하게 쓰고 있는 말이다보니 소중함조차 못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일반 개인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정부는 좀 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러고보니 일본은 메이지 정부 때 그들은 강력한 서구에 굴복해 자신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인식했던 때가 있다. 일본어를 폐기하고 영어를 국어화하자는 주장을 내세웠으며 서양인과의 잡혼으로 인종을 개량하자고까지 했다. 지금 들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쓰는 언어를 보면 굳이 누가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러다가 언젠가는 표기만 한글인 한국어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오 마이 갓, 언빌리버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