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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쵸동맹

삿쵸동맹의 성립 (일본 근대사) 오늘은 이전 실패로 돌아갔던 삿쵸동맹이 다시 성립되는 과정을 알아봅니다. 이미 신용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동맹을 포기하려는 사이고에게 사죄의 뜻으로 군함과 무기를 제공한다면 쵸슈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사카모토는 제안했다. 당시 교역을 제한 당했던 쵸슈는 돈이 있어도 무기를 구할 방법이 없었고, 이에 사츠마의 명의로 무기를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사카모토가 결성한 탈번무사들의 모임 카메야마 샤츄가 이 교역을 중개했고 쵸슈에서 이노우에 카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교역을 위해 이름을 바꿔 나가사키로 파견되었다. 군함과 무기를 선정하는 이노우에 카오루와 이토 히로부미(후에 메이지 유신의 유력 세력이 되는 두 사람) 그리고 1866년 1월 교토에서 마침내 사카모토 료마를 중개인으로 세운 사츠마와.. 더보기
이케다야 사건, 제1차 쵸슈정토, 삿쵸동맹의 발단 (일본 근대사) 오늘은 제1차 쵸슈정토와 삿쵸동맹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뤄봅니다. 1864년 교토 이케다야에서 신센구미에 의한 양이파 참살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양이파는 천황의 탈환 계획을 위해 밀담중이었는데 토사 등의 탈당 사무라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쵸슈의 사무라이들로 이 사건으로 인해 쵸슈는 피해가 컸다. 8월 18일 정변과 이케다야 사건으로 많은 동료를 잃은 쵸슈의 양이파는 천황을 되찾아오기 위해 1864년 교토로 진격, 막부의 편에 선 사츠마와 대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쵸슈정토(=긴몬의 변)이다. 사츠마와의 교전에서 패한 쵸슈는 막부에 저항할 여력이 없어 결국 번 내의 존왕양이파를 처벌하고 막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약속했다.그럼에도 쵸슈는 모든 번에게 조정의 적으로 취급받으며 수모를 당해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