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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스케

요시다 쇼인, 안세이 대옥, 사쿠라다몬가이의 변, 테라다야 사건 (일본 근대사) 오늘은 흐름에 끼워넣기 애매해서 따로 뺀 인물과 사건을 알아봅니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페리가 일본에 내항했을 때 흑선에 밀항을 시도했다. 카츠라 코고로(=키도 타카요시)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는 카츠라와의 인연으로 요시다 쇼인과 대면하게 된다. 이들은 결국 밀항에는 실패, 스스로 부교쇼에 가서 밀항 시도를 알리고 쵸슈로 잡혀갔다.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는 키도 타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의 사상가와 지사들을 배출해냈다. 그는 이후 막부를 비난해 하ㅣ모토 사나이와 함께 안세이 대옥 때 사형당했다. 어렸을 때 타고 있던 배가 난파당해 미국에서 10년을 살고 돌아온 토사번 출신의 존 만지로(본명 나카하마 만지로), 이후 토사번이 나가사키에서 교역하는데 통역관으로 일하며 도움을 .. 더보기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조인 (일본 근대사) 자, 오늘은 미일 화친 조약과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에 대해 알아봅니다.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막부는 관행을 깨고 각 다이묘들에게 의견서를 올리도록 했다.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매우 의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결국 조정과 유력 다이묘들에게 막부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미국의 위협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막부의 정치력에 대해 많은 사람들, 특히 하급 사무라이들이 의문을 품게 되고 이는 결국 막부에 저항해 양이론을 주장하는 씨앗을 뿌린 계기가 되었다. 각 번의 사무라이들은 흑선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 특히 쵸슈번과 토사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양이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1년 후에 오겠다던 페리는 6개월 만에 9척을 이끌고 다시 일본에 내항, 이번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