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NOU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조인 (일본 근대사)

자, 오늘은 미일 화친 조약과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에 대해 알아봅니다.

 

막부는 친서의 내용을 다이묘들에게 공개하고 의견을 물음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막부는 관행을 깨고 각 다이묘들에게 의견서를 올리도록 했다.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매우 의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결국 조정과 유력 다이묘들에게 막부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미국의 위협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막부의 정치력에 대해 많은 사람들, 특히 하급 사무라이들이 의문을 품게 되고 이는 결국 막부에 저항해 양이론을 주장하는 씨앗을 뿌린 계기가 되었다.

 

양이론이 일고 있는 토사번

 

각 번의 사무라이들은 흑선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 특히 쵸슈번과 토사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양이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1854년 1월 16일 페리의 내항

 

1년 후에 오겠다던 페리는 6개월 만에 9척을 이끌고 다시 일본에 내항, 이번에는 우라가를 지나쳐 요코하마로 내항했다.

 

요코하마에서 이루어진 미일 협상

 

미일 화친 조약 조인

 

결국 1584년, 개국을 결정하고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는다.  조약의 내용은 하코다테, 시모다의 개항, 영사의 주재, 편무적 최혜국 조항 등을 포함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자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도 막부와 화친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코메이 천황과 로주 홋타 마사요시

 

미국총영사인 타운젠트 해리스는 로주인 홋타에게 통상 조약의 체결을 독촉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더불에 1858년, 중국의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세력에 위협을 느꼈던 막부는 양인이 싫다고 언급한 코메이 천황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카나가와, 나가사키, 니카다, 효고 등의 개항과 오사카의 개시(開市), 재류외국인에게 치외법권과 관세자주권의 방기를 인정하는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