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재의 이야기가 비슷한 전개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지만 소설 28의 1쇄 발행일이 6월 16일, 영화 개봉일이 8월 14일로 단 2개월의 공백을 두고 공개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너무나 비슷한 이 두 작품, 영화의 감상평으로 소설과의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두 작품 모두 <스포 대방출!> 이오니 주의 바람.
공통점 1. 서울 근교의 도시에서 치사율 100%의 전염병 발생 |
소설 28에서는 서울 근교 가상의 도시 '화양'이라는 도시가 배경이다. 인구 29만, 서울까지 대략 한 시간 내외의 거리이다. 구체적인 감염경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단 감염되면 24~48시간의 짧은 잠복기를 거쳐 빠른 증세를 보인다. 이 전염병의 대표적 특징인 결막출혈로 인한 '빨간눈'과 함께 고열, 호흡곤란, 폐출혈 증상을 보이며 나흘을 넘기지 않고 사망한다.
영화 감기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서울 근교 '분당'이라는 도시가 배경이다. 인구는 약 50만, 서울까지 대략 30분 내외의 초근접권이다. 밀입국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만들어진 변종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H5N1이 전염병의 정체이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잠복기 없이 기침, 홍반, 고열 증상을 호소하며 감염 후 36시간 이내에 사망한다.
공통점 2. 전면도시봉쇄 |
치료약이 없는 상태에서 전염병이 폭발적인 속도로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자 소설과 영화에서는 모두 전염병의 근원지인 도시를 봉쇄하기로 결정한다. 대통령 담화문이 발표되고 봉쇄 도시의 상황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통신망을 두절하고, 군인들을 투입하여 무력으로 도시 시민들을 모두 거처에서 끌어내 집단 수용하고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검사하여 구분 후, 감염자는 모두 살처분했다. 도시주민들은 불공평한 처사에 봉기하게 되고 대규모의 집단이 도시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군은 발포했다.
공통점 3. 의료관계자와 소방대원이 직업인 주인공 |
모든 재난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의료 관계자인 주인공. 소설 28과 영화 감기에는 그에 더해 소방대원도 합류한다. 하지만 그 직업의 역할에서는 사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크다.
소설 28에서는 6명의 주인공 각각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수의사 서재형, 기자 김윤주, 간호사 노수진, 소방대원 한기준, 공익요원 박동해, 그리고 늑대개 링고. 재형과 링고가 소설의 커다란 그림인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면, 수진과 기준은 그들의 직업을 통해 전염병으로 생지옥이 되어버린 도시를 이야기한다. 반면 영화 감기에서는 의사인 김인해, 그녀의 어린 딸 김미르, 소방대원 강지구가 주인공이다. 어떤 가치관의 옳고그름을 묻기보다는 전염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한 엄마의 모성애와 정의를 내세워 사태현상과 해결과정을 보여준다.
공통점 4. 제작의 동기 - 돼지 생매장 사건 |
소설 28의 작가인 정유정씨는 작가의 말에서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본 날 밤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영화 감기의 감독인 김성수씨도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주의 돼지 생매장 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돼지 생매장 사건이 소설 28의 시발점이었다면, 영화 감기에게는 나아갈 방향이 된 셈이다.
차이점 1. 대통령의 역할과 미국의 개입 |
소설 28에서 대통령은 화양이란 도시봉쇄를 공식화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영화 감기에서의 대통령은 현실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정의에 불타는 이상적 인물로 그려져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중차대한 결정권자로 등장한다. 심지어 멋진 외모에 훌륭한 영어실력까지도 겸비한 그는, 동화속 백마탄 왕자님처럼 국민 모두가 꿈에 그리는 대통령의 모습이다.
또한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미국이 무력진압 작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예전에 비해 그 힘은 약해졌으나 여전히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미국이란 강대국이 한국의 대통령보다 우위에 서서 시민 말살을 조장한다. 빠르게 확산되는 치사율 100%의 전염병이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해가 가지만, 굳이 전투기까지 투입해서 막으려 드는 모습에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초반부터 개입하기보다는 정부의 진압이 먹히지 않았을 때 한국이란 나라를 격리시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현실적인 외교부분은 잘 모르겠다.
차이점 2. 극과 극의 결말 - 항체의 발견 |
영화 감기는 해피엔딩이다. 대략 며칠간에 벌어진 참상의 결국에는 전염병의 항체를 발견하고 치료약을 개발한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다행인 것이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부분의 재난 영화에서는 해피엔딩을 위한 해결책을 발견해낸다. '나는 전설이다'나 '월드워Z'에서도 그랬듯 전혀 없을 것만 같던 해결책이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중무장한 주인공의 활약에 의해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낸다. 영화 감기는 '감염된 딸을 구하고자 하는 엄마의 모성애'와 '희생정신과 연심으로 똘똘뭉친 구조대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소설 28은 항체는 커녕, 전염병의 원인조차 알지 못해 석달간 봉쇄된 채로 화양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그 자신마저도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어도 가슴이 먹먹해져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릴 수 있다.
차이점 3. 작품의 메세지 |
영화 감기와는 다르게 소설 28에서의 전염병은 인수공통감염으로,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반려동물인 '개'가 또 다른 희생자로 등장한다. '인간이 살기 위해 동물은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위해 늑대개 '링고'의 시점으로도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 감기가 단순하게 비상사태에서의 인간의 존엄성 존폐를 문제삼는다면, 소설 28은 한 발 더 나아가 동물의 생존권에 대해서까지 문제 삼는 것이다. 즉 김성수 감독이 모티브가 된 살처분 당하는 돼지에 인간을 투영했을 뿐이라면, 정유정 작가는 살처분 자체의 당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공생의 의미를 묻는다.
같은 현상, 다른 결말 |
여름방학에 개봉하는 재난 블럭버스터인만큼 그럴듯한 최악의 사태와 극적인 해결책, 그리고 관객을 안심하고 극장밖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 해피엔딩을 마련한 영화 감기는, 오글거리는 몇몇 장면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가 뻔한 결말이라고 욕을 할지라도 그렇다고 소설 28과 같은 결말을 원하지는 않을테니까. 다만 소설을 통해 도시봉쇄와 인간살처분 장면에 이미 면역이 생겨버린 나로서는 영화의 장면이 그다지 낯설지 않아 영화가 한층 더 아쉽게 느껴졌지만 처음 그 장면을 접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생각의 여지를 제공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단순히 영화가 뻔하다던가 재미가 없다던가 하는 것 이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그 상황에 대해 모두가 잠깐이라도 고민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 잡담 |
비교를 하다보니 내용이 길어져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박민하는 너무 애답지 못해 좋아하진 않지만 확실히 연기는 잘 하는 것 같다. 오히려 연기할 때가 더 귀엽다. 장혁은 이 영화에서 유독 발음이 불분명해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소방대원 지구가 미르모녀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진 않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차인표 대통령은 정말 멋졌다. 마동석의 선동은 섬뜻했다. 소설 28에 등장하는 선동자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반해 그는 자신이 감염되자 '서울을 감염시키자'며 덤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있을까봐 겁난다. 수애가 맡은 의사역은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흘러가면서 좋게 포장됐지만 생각해보면 꽤 이기주의적인 여자다. 목숨을 구해준 구조대원에게 고맙다는 말은 커녕 직업이면서 생색내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던가, 무턱대고 사고현장으로 불러내 가방을 꺼내달라던가, 거절하니 있는대로 성질을 부린다던가, 의사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안 한다던가,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 감염사실을 숨기고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다던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서야 주인공들이 잘 이어진다고 해도 결국은 오래 못갈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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