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씨의 새 소설 28
「 서울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인근도시 '화양'에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붉게 충혈되며 내장 출혈을 일으켜 사람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이끄는 신종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비주얼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이전의 그 어떤 전염병보다도 빠르게 확산되며 치사율 100%라는 점이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급변하자 정부는 아예 '화양'을 철저하게 고립시켜 병균의 자연 소멸을 기다린다. 이 소설은 전염병에 감수성이 없어 무사한 재형, 윤주, 기준, 수진, 동해의 다섯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개 링고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고립도시 상황 보고서이자,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넘어가는 두께
개인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리라 믿는다. 다만 나로서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우울함에 시달려야 했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감정에 더해 엄청한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마침 이 책을 읽는 동안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봤고, '설국열차'를 봤다. 힘 없는 자들의 봉기, 결국 누구에게도 득 될 것 없었던 결말. 허무했다. 그 모든 최악의 상황에도 영화 '설국열차'와 소설 '28'은 모두 나름의 희망의 빛을 심어두었지만, 나 자신이 워낙 염세주의자인 탓에 읽고 보는 것 자체가 그저 고통이었다.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읽고 볼 때도 느꼈지만 인간의 생존욕구는 처절하리만큼 슬프고 무섭고 괴롭다. 차라리 일찍 죽는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설국열차를 보고 돌아온 저녁, 소설 28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인간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재형의 인류애(?)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리뷰를 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비틀린 장면들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있지만 잃은 것이 많았다. 광주사태를 떠올리게 만드는 화양의 도시 고립-본인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도시고립 장면이 먼저 떠올랐지만 현실적인 고려와 작가를 생각해본다면 광주사태가 더 적합할 듯-장면. 전염병만으로도 무서운데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의 인간성조차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도시. 각자 서로 다른 입장의 주장들이 뒤엉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희망을 말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깊은 절망감만을 느꼈다. 재형의 희생으로 말하고자 하는 희망보다 앞서 말한 두 작품과 연계되어 내 머릿속을 지배하게 된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한 도시의 시민들을 산 제물로 삼아 얻고자 했던 대다수의 평화. 자, 그렇다면 실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국가의 입장에서 이 도시를 고립시키지 않고 어찌해야 했을까. 전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유예기간을 주어 도시 바깥으로 빼내오는 방법? 아무리 철저해도 분명 자신은 감염되지 않지만 접촉시 누군가를 전염시킬 수 있는 보균자인 누군가는 전염균을 가지고 도시 바깥으로 나갈 것이며, 그랬다가는 도시 하나로는 끝나지 않을 대규모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인도적인 결정과 대다수를 위한 유혈사태.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충분히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더 테러 라이브'처럼 내가 절대 될 수 없는 사이드의 적, 즉 정부라는 만인 공통의 적일 때는 마음껏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화양의 바로 코앞에 사는 시민이라고 생각하니 무턱대고 정부를 비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세미채식인인 나로서는 동물을 학대하고 몰살시키는 대책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내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마냥 포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서재형이 알래스카에서 그랬듯, 나라는 인간을 1순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라우마로 남을지라도, 서재형이 다시 알래스카로 던져진다하더라도 어쩌면 같은 선택을 했을거라는 말처럼 나 역시 다르지 않았을 거다. 이것이 윤주가 말하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인지라. 머리가 아프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합리적으로, 스트레스 안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죽겠는데 이런 만일의 사태에 대한 생각까지 거듭하느라 머리가 깨질것 같다. 머리로 생각해서 나올 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답이 안나와서 미치고 펄쩍 뛰겠다. 하아...
독서를 위한 준비물, 에버노트 북클립
두께 때문에 책 중간에 꽂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7년의 밤'도 그랬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을 무척이나 많이 사용해서 걸치적거림에도 그런 요소조차 이 소설을 '문학'으로써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문맥상 느낌은 알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확실히 하고 싶어 종종 국어사전을 뒤적거려야 했다. 중후반으로 가면 나를 재촉하는 문장을 따라가기에 바빠 그럴 여유조차 없다. 국어 공부를 위해 이 두꺼운 책을 나중에 다시 한 번 살피며 단어장이라도 만들어야할 것 같다. 다만 지금은 너무나도 우울해서 머나먼 훗날이 될 것 같은 예감... 나의 평안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얼른 똥줄 빠지게 웃기는, 웃다가 무슨 일로 고민을 했는지도차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웃긴 무언가가 지금 당장 필요하다.
책에 포함된 테마 음악 시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재형, 기준, 링고의 테마가 담겨있다.
아, 마지막으로 테마음악에 대해 언급하자면, 처음엔 어짜피 책 읽으면서 음악 들을 일은 없으니 이런 거에 돈 들이지 말고 책 값이나 내려주지 싶었다. 그러다가 프롤로그 '화양'을 듣자 너무나 그럴 듯 해서 독서 중에 읽으면 영화 같은 느낌이 물씬 들겠다는 긍정적 사고전환으로 접어들려 하였으나... 재형의 테마에서 보컬이 나오면서부터 산통이 깨졌다. 독자가 상상해 온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주로만 가야했다. .. 오글거려서 프롤로그 외에는 다시 듣고 싶지 않다는게 개인적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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