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처음 봤다. 예전에 '북촌 방향' 예고편을 보고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인이 그 당시의 내 상황을 감안해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했기 때문에 보고나면 찝찝한 영화인가보다 하고 미뤄왔었다. '우리 선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건전한(?) 영화라는 누군가의 감상평에 이번에는 꼭 봐야겠다 싶어 9월에 새로 오픈한 롯데 시네마 신도림점에서 관람했다.
주요인물은 여자 주인공인 선희,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 문수, 동현, 재학이다. 선희는 곧잘 잠수를 타버리는 영화 감독 지망생이다. 어느날 자신이 졸업한 대학에 나타난 선희는 유학을 가겠다며 은사인 동현에게 추천장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전 남자친구인 문수와 오랜만에 재회한다. 그렇게 선희와 세 남자는 돌고 돌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전 남친 문수
은사 동현
선배 재학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동상이몽
선희는 각각 세 남자를 만나며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보통 여자가 유혹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남자들이 꼬이는 타입도 있지만, 선희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동현과 재학의 마음은 확실히 흔들어 놓았다. 누군가의 감상평에 남자들이 최고로 찌질이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글쎄.. 나는 그것보다 그냥 선희가 좀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 특히 동현을 이용해먹는 것 같아서 괘씸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정도는 기본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냥 나쁜년이다. 하지만 이런 옳고 그름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므로... 이만 넘어가겠다.
영화의 구성은 참 재밌었다. 메인 테마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오는 타이밍이라든가, 소소한 일상의 해프닝이라든가가 너무 '잘 짜여지고 만들어진' 영화들과 달라서 좋았다.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한 동일한 이야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반복하는 사이 조금씩 변질되고 데자부를 느끼게 만드는 부분은 내 주변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없이 공감됐다. 특히 문수가 술에 취해 선배 재학에게 횡설수설하며 '파고 파고..' 하는 부분은 짜증이 나면서도 너무 웃긴 장면 중의 하나였다.
세 사람은 선희에 대해 '조금은 내성적이지만 안목이 아주 좋고 용기도 있는,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같은 말로 누군가를 묘사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 누군가가 한 사람이란 것은 알지 못한다. 영화 초반에 동현이 묘사하는 선희의 모습에서 점점 사심이 섞이며 실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며, 역시 사람의 말은 믿을만한게 못되는 구나 싶었다. 애초부터 남들이 '착하다'는 말을 쓸 때는 절대 믿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흔히 그 표현은 나에게 잘해주면 착한 사람, 그렇지 못하면 바로 나쁜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 남자가 묘사하는 선희는 다분히 사심으로 채워진 하나의 만들어진 상(像)인 것이다.
딱히 알아 쓸모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묘사할지 새삼 궁금해졌다.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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