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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도서] 정글만리 - 소설을 가미한 경향보고서? 자기계발서?

'조정래'라는 이름이 갖는 저명함, 신뢰감 때문에 알아보지도 않고 덥썩 '정글만리'를 사들였다. 하긴 알아보았다고 해도 예스 24 평가들은 하나같이 최고다라는 찬사들이 가득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테지만. '조정래'씨의 작품이나 실력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다. 내겐 그럴 자격도 없고. 다만 조정래씨의 이름만 알지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나같은 사람을 위한 현실적(?)인 의견을 써보고 싶었다. (1월에 읽은걸 한 달이나 걸려 다시 쓰는 중)

 

나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가 좋고 그럼에도 감성이 제대로 뭍어나는 문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고 정유정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을 읽다 정글만리를 읽다보면 먼저 문체의 단숨에 먼저 실망하게 된다. 문장의 유려함이나 마음을 울리는 섬세함보다는 오히려 투박하고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감정을 건드려 마음 한구석을 간질이는 소설이 아니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는 단순명료한 메세지를 담은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느낌이다. 일명 '중국통이 된 홍대리?!!!' (사실 홍대리 시리즈를 안읽어 봐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고 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 '수프가게'같이 메세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이 문단의 요지)실제 주변에 있음직한 인물이 아니라 뭐랄까.. 너무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분명 전대광이란 캐릭터는 인정많고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로 설정된 것이 맞는데 나는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건 말투다. 배경은 2010년대인데 사람들은 60대건, 40대건, 20대건 60년대식 말투가 남아있다. 주인공인 전대광이 이런 말투를 쓸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송재형과 리옌링의 연애 행각은 정말이지 손발이 오글거려 눈 뜨고 못봐주겠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속상해하지 말고 실컷 즐기세요. 처가 나라 것은 바로 송재형 씨 것이기도 하니까요,." 리옌링이 입을 가리고 돌아서며 호호호호 웃음을 터뜨렸고, "예에, 말 잘 했어요, 리옌링도  내 것, 이 호수도 내 것, 다 내 꺼에요." 송재형이 리옌링을 곧 안으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리옌링이 송재형을 피해 방울 구르는 소리로 웃음을 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송재형이 따라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물속에서 함께 뛰고 있었다.

 

아낌없이 주련다(1962)

 

티비에서 얼핏 보았던 방화의 한 두 장면이 스치고 지나간다.... 권당 400여 페이지에 세 권짜리를 이런 문체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1권 초반부터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1권만이라도 먼저 읽어볼껄 왜 처음부터 3권까지 다 샀을까 하는 후회가 나를 짖눌렀다.  

 

그러나 꾸준히 읽다보니 이런 문제는 다행히 극복이 가능했다. 두 번째는 시선 차이에서 부딪히는 문제였다. 일본의 극우 정치가 비지니스맨을 가까히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정글만리에 나오는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비호감이었다. 한국과 중국을 발밑에 놓고 보는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언행을 일삼는 일파였다. 내 주변의 일반적인 일본인들과 많이 달랐고 - 혹은 그들이 내 앞에서만 달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래서인지 국수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 중 한국인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려졌다. 심지어 인정도 많고 재주도 많다. 전대광이 그렇고 김현곤이 그렇고 송재형도 그렇다. 다소 찌질했던 서하원도 후반에서는 그럴 듯 해진다. 정글만리는 중국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 관해서는 좋은 점, 나쁜 점이 골고루 드러나 그 나름대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 보이는데 일본인들은 일관되게 비열한 기회주의자로 그리고 있다. 하긴 현재의 국제적인 정세를 생각해본다면 그런 시선도 부정할 수만은 없겠다.

 

이렇게 한가득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름대로 얻은 것도 있다. 바로 중국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다. 전에 호주에서 중국출신 매니저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다시는 중국인과 일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됐지만, 그래도 그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만만디와 콰이콰이의 적용법이라던가. ㅎㅎ 또 한가지는 중국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정글만리에 나온 마오쩌둥과 그의 업적 또는 실패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새삼 나 자신이 중국의 역사에 굉장히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 일본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일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는데 마침 정글만리를 읽으니 한중일 삼국의 관계에 더더욱 그 호기심이 강해지는 것이다. 어떤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끼쳐 지금의 중국인들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런 점에선 정글만리가 내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했다기보다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책 이었던 것 같다. 정글만리 완독 후 바로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중국사 책은 지금 잠시 구석탱이에 처박혀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이 관심을 지속시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