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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영화] 26년

*스포일 포함, 영화를 보지 않은 분께는 권장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원작의 디테일이 상당히 달라져서 놀랐다. 물론 영화화시키면서 각색을 거칠것은 예상했지만 그렇게 많이 고칠 줄은 몰랐다. '이웃사람'이 원작 그대로 영화화되었었기 때문에 '26년'도 그럴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체적인 맥락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다른지 몇 가지 살펴보자.

 

 

짧아진 과거사

 

- 영화화하면서 스토리의 정리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라 생각한다. 5.18의 주요한 부분과 각 인물들이 어떻게 가족을 잃었는지 한번에 요약되서 보여진다. 그 과정에서 미진의 어머니는 청사앞이 아닌 집에 있다가 밖에서 날아온 총알에 맞아 즉사, 정혁은 청사앞에서 도망치다가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누나를 계엄군의 총격에 잃는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진배의 아버지의 죽음은 동일하나 김갑세의 동기유발 연관성이 매우 축소되었다.

 

- 5.18 항쟁 장면은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었다. 아무래도 직업병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데,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음영을 강하게 표현해서 극적인 느낌이 더 강조되었고 인물의 표정도 상당히 부드러웠으며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특히 진배의 어머니가 남편의 시신을 찾다가 구르는 부분의 움직임은 탄성이 나올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굉장히 가볍게 생각하지만 26년에서처럼 어색함없이 동작을 표현해내려면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실제로 촬영하는 것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데도 애니메이션을 채택한 감독의 결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정혁의 누나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부분은 표현이 과했다는 생각. 내장이 빠져나오는 움직임 때문에 씁쓸한 실소가 흘러나와 감정에 빠져들지 못했다. (이건 아마도 극히 개인적인 감상)

 

인물들의 역할 축소

 

- 원작에서는 김갑세가 시한부를 선고받고 더 이상 일을 미룰수 없기에 각 인물들을 불러모은다.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삭제되었다. 거사를 진행하게 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부분이 간과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 반면 김주원의 역할은 조금 더 확장되었고 원작에서 김갑세의 실제 아들이었지만 영화에서는 5.18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한 것으로 나온다. 이 설정만큼은 원작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 마음에 든다.

 

마상렬의 정당성이 축소된 것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이다. 원작에서는 자신의 목숨보다 그사람에게 더 집착하며 가까스로 얻은 기회를 번번히 무산시키는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매우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단 몇줄의 대사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 마상렬과 김갑세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을런지도 약간 의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여 준 그 둘의 과거가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문제인 듯 하다.

 

- 최계장은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개성이 사라졌고 부가설명이 삭제되어 필요한 부분에만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나름 카리스마를 뿜었는데 영화에서 보니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굳이 존재감을 부여하지 않아도 전혀 무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 진배가 몸을 담았던 조직의 우두머리 안수호 역시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존재감도 있었으나 영화속 이야기의 흐름에 크게 기여하는 바는 없다.

 

미묘한 관계의 변화

 

- 미진과 진배의 미묘한 러브라인이 추가되었다. 원작에서도 그 둘은 다른이들에 비해 연대감이 강했으나 영화에서는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한다. 진배의 관심표현에 은근 보는 이도 기분이 좋아진다. 배우 진구를 이전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진배라는 역할은 그에게 정말 딱 맞는 옷이었다.

 

- 정혁은 우직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다른 인물들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미진의 총격사건후 원작과는 다른 행동을 취해 모두와 관계가 어긋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야 될 것도 같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어디서나 배신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원작보다 그의 과거사가 축소되면서 표현되는 절실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거나 싶다.

 

生과 死

 

극적으로 긴장감을 주기 위해 필요했던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헐리웃 영화도 아니고.. 총격난사는 조금 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대립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며 우리의 주인공들은 원작과는 다른 마지막을 맞는다. 영화가 더 비극적인 것은, 총성뒤에 감춰진 진배와 미진의 결말이 예측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추가된 한장면이 보여주듯 26년에서 6년이나 더 흐른 32년 지난 오늘도 그사람이 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인기가 있던 작품이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가 되기란 쉽지 않다. 관객은 이미 원작에 만족해있는데 영화는 시간의 제한이라는 굴레에 갇혀 원작의 모든 디테일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작환경만 받쳐주었다면 디테일을 좀 더 살려 러닝타임을 늘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덧없는 상상도 해본다. (반지의 제왕도 러닝타임이 무려 199분이지 않은가.) 스토리 진행에 급급해서였을까. 초반의 애니메이션에서만큼 감정이입 할 수 있던 장면이 실사에선 부족했다.

 

하지만 영화화되기까지의 수많은 역경을 감안하면 충분히 훌륭했다. 무엇보다 맨처음 강풀 작가가 목표로 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 가 기억되는 것만을 두고 생각하자면, 이미 완벽한 성공을 거둔게 아닐까 싶다.